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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려 하니 근심과 분함 견디기 어려웠다”

홍성신문 기자입력 2026.09.07 08:36

신보균은 홍동면 수란리 왕지마을 출신으로 1906년 홍주의병에 참여해서 유병소 향관이라는 직책을 맡아 10여 일 동안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 과정에서 포로로 잡혔다. 이때 잡힌 포로는 80여 명으로 모두 경성으로 압송돼 재판받고 대부분 풀려나는데 신보균을 비롯한 9명만이 대마도로 유폐된다. 이들을 홍주9의사라고 부른다. 신보균은 1906년 6월 18일부터 1908년 6월까지 대마도에서의 유폐 생활을 일기로 남겼다. 표제는 같이 고생한 기록이란 뜻의 <동고록>이라 이름 지었다. <동고록> 4권 중 1권에 대해 지난달 25일 번역이 이뤄졌다. 번역된 내용을 3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홍주의병으로 대마도 유폐를 당한 신보균은 같이 고생했다는 뜻의 동고록이란 일기를 남겼다. 
홍주의병으로 대마도 유폐를 당한 신보균은 같이 고생했다는 뜻의 동고록이란 일기를 남겼다. 

현재 전하는 신보균의 기록은 <동고록>, <대마도일기>, <정미일기>, <무신일기> 등으로 이어지며 1906년부터 1908년 무렵까지의 일을 담고 있다. 특히 <동고록> 앞부분은 홍주의병 참여에서 시작한다. 민종식의 창의 소식을 들은 과정, 홍주성 입성, 일본군의 공격과 체포, 홍주에서 서울까지의 압송, 일본군 수금장 생활과 재판, 대마도 이송, 먼저 유폐된 홍주의병 9인의 생활, 최익현·임병찬의 합류가 시간순으로 이어진다.

<동고록>은 신보균 개인의 일기이면서 동시에 홍주의병 9인의 집단생활 기록이고, 더 넓게는 1906년 홍주의병 패전 이후 살아남은 의병들의 내부 증언록이라 할 수 있다. 홍성군 학예연구사 이윤현 씨도 이번 번역의 의미에 대해 “그동안 대마도 유배와 관련한 내용은 류준근의 <마도일기>, 임병찬의 <대마도일기>, 문석환의 <대마도일기> 등에 의존해 왔지만 이번 번역을 통해 의병에 참여한 인사들의 개인적인 가치관과 사상, 대마도 유배생활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평가했다.

<동고록>의 등장은 기존 자료를 대신한다기보다, 기존 기록과 나란히 놓고 당시의 역사를 다각도로 검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핵심 1차 사료가 추가됐다는 데 의미가 있다. “왜 의병이 되었는가”…신보균 자신의 대답이 나왔다, 이번 번역에서 신보균 연구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대목 가운데 하나는 그가 의병에 참여한 이유를 자기 목소리로 남겼다는 점이다.

홍성신문의 기존 기획보도에서는 신보균이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는 과정에 참여했고 홍주의병에 합류한 사실을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했다. 그러나 ‘왜 목숨을 걸고 의병에 들어갔는가’에 대해서는 그의 주변 인맥과 당시의 정치 상황, 유학자로서의 의리 의식 등을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의병에 참여하게 됐는지 분명한 의지 밝혀

“동고록”에는 그 답이 있었다. 홍주성이 함락된 뒤 일본군의 심문을 받은 신보균은 말했다. “나라가 장차 망하려 하니 근심과 분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음이 있을 뿐이다.” 짧은 말이지만 신보균의 생애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이다. 그의 의병 참여는 단순한 지인의 권유나 우발적인 가담이 아니었다. 그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국권을 잃어가는 현실을 ‘나라가 장차 망하려 한다’고 인식했고, 이를 견딜 수 없어 행동에 나섰다고 직접 밝혔다. 더욱이 체포돼 일본군의 심문을 받는 상황에서도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부인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죽음이 있을 뿐”이라는 말로 자신의 선택을 받아들였다.

<동고록>을 통해 신보균의 의병 참여 과정도 보다 세밀하게 나타난다. “2월 24일에 참판 민종식이 창의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흥의 00가 은밀히 통지해 왔기에, 민 대감에게 가서 뵙고, 21일에 홍주성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그 이튿날 집에 돌아와 아들에게 집안일을 분부하고 그대로 성안으로 가 보았더니, 민 대감이 도모하던 일이 끝내 뜻대로 되지 않아 모두 흩어져 버렸다. 그래서 곧 집으로 돌아왔다. 홍산에서 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4월 초에 가 보니 민 대감은 있지 않고 몇 사람이 먼저 도착하여 마을에서 총포를 거두고 있었으나 볼 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또 집으로 돌아왔다. 26일에 민 대감이 홍주성을 점거하여 지킨다는 소식을 듣고, 27일에 가서 뵙고 곧 돌아와 집안일을 단속하고 어머님께 하직 인사를 올렸다. 28일에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 유준근과 함께 유회소에 머물렀다”

이 장면은 중요하다. 신보균이 단순히 상황에 휩쓸려 홍주성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닥칠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도 의병 참여를 스스로 선택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홍주성 최후의 순간 그는 도망가지 않았다. 일본군이 성을 포위하고 총탄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유준근과 유회소에 남았다가 체포됐다. <동고록>은 그렇게 ‘공훈록 속의 신보균’을 한 사람의 선택과 행동이 이어지는 살아 있는 인물로 되돌려 놓는다.

또한 신보균은 <동고록>에 홍주성 전투 자체 못지않게 패전 이후의 역사를 상세하게 기록한다. 당시 일본군은 홍주성 함락 뒤 윤석봉 등을 포함한 83명을 압송했다. 이들은 홍주에서 출발해 예산 신례원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온양을 거쳐 천안으로 이동했다. 천안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 남대문 밖에 도착했다. 서울역에 도착한 순간부터 이들은 사실상 전쟁 포로처럼 취급됐다.

83명은 포박됐으며 눈까지 가려졌다. 끌려간 곳은 옛 선혜청 건물을 일본군이 수금장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이름과 나이, 주소를 조사받고 소지품을 압수당했다. 홑적삼과 홑바지만 입은 채 감방으로 들어갔다. 주먹밥이 지급됐지만 신보균은 분한 마음 때문에 먹고 싶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대변을 볼 수 있는 시간까지 제한됐으며 주위를 병사들이 에워싸 감시하는 모습도 기록돼 있다.

일본군의 군사재판 결과도 자세히 남겨

신보균은 재판 결과도 자세히 남겼다. 기록에 따르면 신보균은 3년의 감금형을 선고받았다. 유준근·이식·남규진·신현두는 무기형, 이상두는 15년, 최상집은 5년, 문석환은 4년, 안항식은 1년이었다. 일부는 3개월 형을 받았고, 나머지 상당수는 태형 30대 또는 50대를 맞은 뒤 석방됐다. 옥중에서 병으로 숨진 사람들의 이름도 등장한다. 조희룡·이치상·오상묵 등이 수감 중 병사했고 박규와 김춘성 역시 감금 중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뒤에 들었다고 기록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일본군의 군사재판 자료 및 다른 의병 기록과 한 사람씩 대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고록>이 홍주의병 연구에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홍주의병의 역사를 ‘홍주성 전투와 지도자’에 한정하지 않고, 패전 이후 체포된 수십 명의 운명이 어떻게 갈렸는지를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06년 6월 18일, 신보균 등 9명이 서울 수금장에서 불려 나왔다. 신보균 등 홍주9의사들은 일본 헌병의 호송을 받으며 용산역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가족과 친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준근의 형과 아우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미리 나와 있었다. <동고록>은 이들이 서로 붙들고 울며 작별했다고 기록한다. 신보균도 안병설에게 자신이 대마도로 끌려간다는 소식을 고향의 가족들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한다. <동고록>의 가장 큰 힘은 바로 이러한 데 있다. 전쟁과 의병운동을 국가의 역사에서 사람의 역사로 바꾸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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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신문 기자

기획·특집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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