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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잡은 서천의 낮, 시민과 흥한 강릉의 밤

노진호 기자입력 2026.09.19 16:13

지방소멸의 위기 속에서 국가유산 활성화의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국가유산을 활용한 관광·체험 프로그램과 도시 재생 사업 등을 통한 생활인구 유입 촉진과 지역 경제 활성화가 숙제로 떠오른 것이다. 국가유산청은 지난해 ‘지방소멸 위기 국가유산 대응전략’을 수립·발표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홍성신문은 총 10회에 걸쳐 홍성 지역의 현주소와 지역 국가유산 답사, 타 지역 우수사례, 홍주의사총 문제 등을 보도한다. <편집자 주>

시대의 변화에 쇠락하던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사진은 건물 보수공사 이전인 2023년 3월 드론으로 촬영한 마을. 사진=서천군
시대의 변화에 쇠락하던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사진은 건물 보수공사 이전인 2023년 3월 드론으로 촬영한 마을. 사진=서천군
‘강릉 국가유산 야행’은 2016년부터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핵심 콘텐츠인 드론 라이트쇼(2026년). 사진=강릉문화원
‘강릉 국가유산 야행’은 2016년부터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핵심 콘텐츠인 드론 라이트쇼(2026년). 사진=강릉문화원

한때는 충남 3대 우시장···‘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

서천군에 있는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은 세월이 멈춘 듯한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다. 이 마을은 1931년 장항선 철도 판교역이 개통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한때는 충남 3대 우시장으로 꼽힐 정도였다. 서천군 관광정책팀 박지호 주무관은 “물자 수송과 양조·양곡 산업 등에 힘입어 번성했지만, 일제의 수탈 경로라는 아픈 역사도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잘나가던 마을은 이촌향도 현상의 심화와 2008년 장항선 직선화로 판교역이 이설되면서 인적이 드물어졌다. 그러다 폐산업 시설을 리모델링해 주민들을 위해 활용하자는 의견이 모였고, 그게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을 탄생시켰다.

서천군은 2021년 ‘근대역사문화공간 활성화 사업’ 공모에 선정되며 장미사진관과 판교극장 등 과거 시설을 리모델링했다. △동일정미소 △동일주조장 △장미사진관 △일광상회 △오방앗간(삼화정미소) △중대본부 △판교극장 등 7곳을 국가문화유산으로 등록한 서천군은 2023년엔 종합정비계획이 승인돼 문화유산 사유지 일부를 매입해 보수·정비했다.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을 찾은 건 더위가 한창인 한여름, 한낮이었다. 덕분에 다른 방문객들에게 피해(?)를 주진 않았지만, 걸음걸음마다 필자의 시간이 멈추는 듯했다. 그럼에도 그곳은 한 번 가볼 만한 곳이었다.

‘바람 불어 좋은 날’ 등 이창호 감독의 영화가 나오던 판교극장의 예스러운 매표소가 인상적이었고, 삼화정미소와 촌닭집, 장미사진관 등은 요즘 풍류를 담으려 애쓰면서도 옛 모습을 최대한 살려놓았다. 동일주조장과 정미소 등은 사유지로 내부를 볼 수 없어 아쉬웠으나, 45번으로 시작하는 전화번호가 색달랐고, 간판만 남고 기능은 사라진 서울시계점도 눈에 들어왔다.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이 옛 영광에만 기대는 곳은 아니다. 서천군과 서천문화관광재단은 올해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 제1차 문화예술 기획전시’를 운영했다. 지난 5월 말부터 8월까지 촌닭집에선 ‘판교의 미술인들’ 전시가, 삼화정미소에선 지역 작가 4인의 대표시와 시 인용 영상 등을 선보이는 ‘판교의 시인들’ 이벤트가, 판교극장에선 이창호 감독 특별전을 펼쳤으며, 장미사진관에선 오는 26일까지 이건수 월간미술 편집장이 기획한 ‘콜렉터의 거실’ 전시가 열린다.

1936년 지어진 삼화정미소는 자연목과 정미설비가 일체를 이룬 구조가 특징이다.
1936년 지어진 삼화정미소는 자연목과 정미설비가 일체를 이룬 구조가 특징이다.
1932년 건립돼 2000년까지 운영됐던 동일주조장은 지역의 근대기와 번영기를 대표하는 산업 시설이다.
1932년 건립돼 2000년까지 운영됐던 동일주조장은 지역의 근대기와 번영기를 대표하는 산업 시설이다.

올해 1~7월에만 1만9588명···“다시 살아나고 있다”

시간이 멈춘 옛 모습과 새로운 문화의 조합은 사람들을 불러왔다. 여기에 드라마 ‘허수아비’ 촬영지로도 입소문이 났다. 올해 1~7월 이 마을을 찾은 건 1만9588명이었으며, 6월이 5035명으로 가장 많았고, 7월이 4254명으로 뒤를 이었다. 가장 중심 공간이라 할 수 있는 판교극장만 살펴보면 올해 3~7월 4580명이 찾았고, 역시나 6월이 1492명으로 가장 많았다.

하지만 서천군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박지호 주무관은 “판교 T자 거리와 골목길 등을 더 정비할 계획이다. ‘근현대문화유산지구’ 지정도 추진할 예정인데 지정되면 등록 외 건축물도 관리할 수 있어 일관된 테마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며 “쇠락해 가던 지역이지만, 분명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말했다.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 안내소의 김진아 매니저는 “콩국수·냉면 등이 유명해 여름에 많이 오는 편”이라며 “해마다 10월 도토리묵 축제도 하니 들러주시길 바란다. 따로 말씀하시면 간단한 안내도 해드린다”고 전했다.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은 올해 1~7월에만 1만9588명이 다녀갔다. 사진은 중심 거리 모습.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은 올해 1~7월에만 1만9588명이 다녀갔다. 사진은 중심 거리 모습.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은 드라마 허수아비 촬영지로도 주목받고 있다. 사진은 취재 당일 마주한 한 종편 채널 촬영 모습.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은 드라마 허수아비 촬영지로도 주목받고 있다. 사진은 취재 당일 마주한 한 종편 채널 촬영 모습.
‘강릉 국가유산 야행’의 성공은 예향·문향의 도시라는 기반에 시민의 힘이 더해진 결과다. 사진=강릉문화원
‘강릉 국가유산 야행’의 성공은 예향·문향의 도시라는 기반에 시민의 힘이 더해진 결과다. 사진=강릉문화원

2016년 시작 ‘강릉 국가유산 야행’···90만명 발길

지난 8월 14~15일 홍주읍성에선 국가유산 야행이 펼쳐져 반가웠다. 하지만 홍성의 갈 길은 멀다. 야행으로 지역 활성화를 꿈꾼다면, 반드시 눈여겨 볼 곳이 있다. 바로 ‘강릉’이다.

‘강릉 국가유산 야행’은 국가유산청이 야행을 시작한 2016년부터 열렸으며, 횟수로는 열네 번을 펼쳤다. 강릉문화원 정운성 사무국장은 “초기엔 1년에 두 번 개최 지침이 있었다. 예산은 한정적인데 두 번을 하니 콘텐츠에 대한 투자가 줄었고, 팬데믹을 거치며 연 1회가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릉 국가유산 야행’은 영동지방을 관장하던 행정관청인 강릉대도호부를 중심으로 진행되며, △야경(밤에 비춰보는 문화유산) △야로(밤에 걷는 거리) △야사(밤에 만나는 역사) △야화(밤에 보는 그림) △야설(밤의 공연) △야시(밤의 문화시장) △야식(밤에 더 맛있는 음식) △야숙(문화유산에서 하룻밤) 등 8가지 밤의 테마로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구성된다.

야행을 통해 강릉을 찾은 사람은 2016년 7만7000여 명으로 시작해 2018년 처음 10만명을 돌파했으며 지난해에는 15만2630명으로 첫해의 두 배에 달했다. 현재까지 90만명 가까이 다녀간 강릉은 2017·2019·2021·2023년 ‘최우수 야행’으로 뽑혔으며, 지난해에는 ‘국가유산 활용 대표 브랜드 사업’으로도 선정됐다.

정운성 사무국장은 “팬데믹 때는 강릉만 야행을 열었다. 그때만 시기를 늦췄고, 접촉보다는 관람 위주의 비대면 축제로 진행했다. 특히 ‘드론 라이트쇼’가 주효했고, 이후 핵심 콘텐츠로 자리매김했다”며 “국가유산 활용 대표 브랜드 사업 중 야행은 강릉과 인천 차이나타운이 포함됐다. 그간의 활동을 평가한 결과로, 2025~2027년 야행 공모 심사가 면제됐다”고 말했다.

강릉은 신라시대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사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던 예향·문향의 도시지만, 단지 물려받은 것으로만 야행이 성공한 건 아니다. 강릉문화원을 필두로 한 시민의 노력이 눈부신 성과의 기반이 됐다.

90만명 가까이 찾은 ‘강릉 국가유산 야행’의 중심 공간인 강릉대도호부 관아 아문.
90만명 가까이 찾은 ‘강릉 국가유산 야행’의 중심 공간인 강릉대도호부 관아 아문.

중심엔 시민···강릉문화원 직접 운영 노하우도 장점

강릉문화원은 3부 6팀으로 구성됐으며 23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이 정도면 전국에서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강릉시·문화재단과의 역할 분담에 관해 묻자, 정운성 사무국장은 “문화원의 주인은 시민, 재단의 주인은 지자체라 생각한다”며 “지자체와 완전 분리는 어려워도, 때론 경쟁하고 때론 협력하며 스스로 주체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만의 사업 개발과 발전이 중요한 것”이라고 답했다.

‘강릉 국가유산 야행’의 중심에도 시민이 있다. 정운성 사무국장은 “관광도시 강릉은 8월이면 피서지 중심으로 재편된다. 8월은 강릉 사람들에게 일하는 시기다. 저녁에 그런 시민을 위로하고 함께 즐기는 행사를 만들자는 게 야행의 시작”이라며 “기본은 시민이다. 시민이 구경꾼에 머물면 지역 행사가 아니다. 그렇기에 지역에서 이끌어 갈 수 있는 단체 참여가 열쇠였다. 조선시대 강릉부사 취임 과정을 ‘행차’라는 이벤트로 꾸며 지역 기관·단체장이나 시민 대표가 참여한 게 관심을 높였다”고 말했다.

외부 관광객과 시민 사이의 균형에 관해 묻자 “강릉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중요하다. 내가 해외에 갔을 때도 궁금한 건 그곳의 사람들이었다. 강릉이 신나야 관광객도 신이 난다. 강릉이 어떻게 노는지를 보여주면 된다. 우리 식의 행사를 하면 고민도 줄어든다”고 전했다.

강릉문화원은 지난 10년간 야행을 직접 구상하고 실천했다. 그 노하우도 이젠 빼놓을 수 없는 강릉의 장점이다. 정운성 사무국장은 “기획부터 마무리까지 문화원이 직접 한다. 전국의 많은 행사가 외부 용역을 주는데 그러면 효율성이 떨어진다. 우린 모두 행사 자체에 쓸 수 있는 것”이라며 “전통문화 축제 중 전국 최대인 강릉 단오제를 수십년 운영한 경험도 큰 힘”이라고 말했다.

강릉문화원은 콘텐츠 고도화와 지역 상생을 위한 고민도 계속하고 있다. 2018년엔 코레일 연계 관광프로그램을 시도했고, 2019년 강릉대도호부 부임 행차 퍼레이드를 열었다. 2020년엔 밤하늘에 드론을 띄웠고, 2022년부터는 퍼레이드의 시민 참여를 확대 중이다. 명주동의 옛 병원 건물에서 할머니가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프로그램 등도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또한 관아 인근 경강로~토성로~서부시장~명주동 등 공간 확장도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정운성 사무국장은 “올해는 관아 인근 100년 넘은 성당과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을 활용했다. 그런 곳의 문을 여는 게 쉬운 건 아니다. 한국은행 총재까지 설득했을 정도”라며 “강릉의 명소로 뜬 월화거리 형성에 야행이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강릉의 매력을 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서현 문화유산활용팀장은 “대도호부 관아 일대에는 볼만한 소품샵이 많다. 예전보다 발길이 줄어든 주문진 수산시장 상인들의 노력도 대단하다. 꼭 가보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 기사는 2026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 지원을 받았습니다>

강릉문화원 정운성 사무국장은 “시민이 구경꾼에 머물면 지역 행사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사진은 올해 강릉대도호부사 부임행차 퍼레이드. 사진=강릉문화원
강릉문화원 정운성 사무국장은 “시민이 구경꾼에 머물면 지역 행사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사진은 올해 강릉대도호부사 부임행차 퍼레이드. 사진=강릉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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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호 기자

기획·특집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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