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아리값에 내주고 황소값으로 다시 산 땅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낯선 이야기지만, 1960~1980년대 광천읍 벽계리에는 미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흔적조차 희미해졌지만, 부대 주변 마을에는 그 시절만의 풍경과 웃음과 애환이 있었습니다. 이 연재는 거창한 역사를 기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가 미처 기록하지 못했던 홍성의 한 시대와 마을의 생활사를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홍성군 광천읍 벽계리는, 해발 320m 지기산(智基山) 동쪽 기슭에 포근하게 자리 잡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국도 21호선이 지나고, 들판 건너편으로는 장항선 철도와 맑은 하천이 나란히 흐른다.
철길과 사이좋게 속삭이며 흐르는 냇물은 마을 앞에서 십여 리를 더 굽이굽이 흘러 옹암포구를 지나 서해 천수만으로 흘러든다. 마을 이름 벽계리(碧溪里)도 이 냇물에서 유래되었다. 푸르다는 뜻의 ‘벽(碧)’과 시냇물을 뜻하는 ‘계(溪)’, 마을을 뜻하는 ‘리(里)’가 합쳐진 이름이다. 물이 어찌나 맑았던지 속살까지 푸르게 보일 정도였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벽계리 사람들에게 지기산은 단순한 뒷산이 아니다. 마을을 포대기처럼 감싸 안은 마음의 고향이다. 예부터 지기산은 소가 누워있는 형국의 와우형(臥牛形) 명산이어서 명당자리가 많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산 곳곳의 명당에는 조상들이 잠들어 있고, 그 조상들이 마을과 후손들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지기산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천수만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여 있어 밤이면 선녀들이 내려와 놀다 간다는 전설까지 전해지는 산이다. 그런 지기산에 뜻밖의 변화가 찾아온 것은 1960년대 초반 무렵이었다. 어느 날부터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지기산 아래에 미군 부대가 들어온다더라.” “부대가 들어오면 마을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더라.”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소문에 사람들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소문과 함께 마을 주변에 낯선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곳저곳 측량하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마을 사람들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가가 물어도 대답은 시원찮았다.
“여기는 뭐헐라구 측량 헌대유?” “···” “여기루 무슨 시설이 들어오나유?” “···” 사람들은 묵묵부답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답답해서 자꾸만 캐물었다. “군사비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짧았다. 그럴수록 소문은 눈덩이처럼 더욱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들에게 마을회관으로 모여달라는 연락이 왔다.
‘올 것이 왔구나.’ 마을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하나둘 회관으로 모여들었다. 잠시 후 군용 짚차 몇 대가 마을로 들어왔다. 민간인 복장을 한 사람들과 군인들이 내렸다. 자신들은 국방부에서 나왔다고 했다.
군인들은 마을회관 벽에 커다란 지도 한 장을 붙였다. 지도에는 미군부대가 들어설 자리가 선명하게 표시돼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말없이 지도를 바라봤다. 누군가는 안경을 고쳐 쓰고 지도를 가까이 들여다봤고, 누군가는 옆 사람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가 우리 산 아녀?” “그려. 저쪽 산자락까지 다 들어가는 모양인디···” 잠시 후 군인 한 사람이 지도 옆에 서서 설명을 시작했다. 마을에 떠돌던 소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미군부대가 들어온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을 전체가 다른 곳으로 터를 옮겨야 한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다.
부대가 들어설 곳은 지기산 정상 일대와 마을 초입의 산기슭이었다. 문제는 그곳에 몇 채의 민가가 있었고, 무엇보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산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주김씨, 안동김씨, 연산서씨 등 여러 성씨의 조상들이 명당 자리에 잠들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산소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었다. 조상 대대로 지켜온 신성한 자리였다.
군인들의 설명은 처음부터 지나치게 딱딱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고, 상부에서 이미 결정한 일이므로 협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라를 지키는 일이므로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마을에는 6·25전쟁 때 인민군들에게 희생된 주민들도 있었다. 군인들이 마을 가까이에 주둔한다면 오히려 든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설명하는 태도가 마음을 상하게 했다. 마치 촌사람들이라고 무시하며 통보하듯 이야기하는 태도가 못마땅했다. 땅을 내놓더라도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는 생각이 슬금슬금 밀려왔다.
그때였다. 평소 성질 급하기로 소문난 김씨가 벌떡 일어섰다. “이보슈! 이게 당신네들 땅여?” 회관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김씨는 팔을 걷어붙이고 씨근덕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고분고분 사정허구 설득허는 것두 아니구, 무조건 땅 내놓으라구 윽박질르는 거여? 당신네들, 그게 워디서 배워먹은 행실여?”
마른나무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맞어! 촌사람들이라구 깐보구 함부루 대허는 거여, 뭐여?” “내 참말루, 맽겨논 땅두 아니구 뭐허는 짓거리들여?” “당신네들 맘대루는 안 될 테니께 한번 헤봐!”
여기저기서 참았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용하던 회관 안이 순식간에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끄러워졌다. 군인들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에는 순박한 농촌 사람들이니 조금 강하게 밀어붙이면 일이 쉽게 풀릴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위기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자 곧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회의장에 있던 군인 중 가장 높은 계급장을 단 소령이 벌떡 일어섰다.
“아, 아닙니다. 저희가 고압적으로 말씀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소령은 연신 마을 사람들을 달랬다. “군인들이 원래 말솜씨가 좀 부드럽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잠깐만 진정하시고 설명을 조금 더 들어주시지요.” 한바탕 거친 말들이 오간 뒤에야 회관의 분위기는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날 설명회는 우여곡절 끝에 큰 충돌 없이 끝났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씁쓸함이 남았다.
결국 벽계리에는 미군부대가 들어왔다. 부대가 들어설 자리의 산소들은 서둘러 다른 곳으로 이장했다. 조상들의 묘를 옮기는 일도, 새 산소 자리를 마련하는 일도, 모두 후손들의 몫이었다. 얼마 뒤 국방부에서 땅값을 찾아가라는 연락이 왔다. 땅을 수용당한 주민들은 장항선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막상 받아 든 땅값은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땅값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적었다. 서울까지 오가는 기차 삯에 밥값이며 이런저런 비용을 빼고 나면 손에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 더구나 조상들의 산소를 옮길 새 땅을 마련하고 이장하는 비용까지 후손들이 부담해야 했다. 그렇게 벽계리의 땅 일부는 주민들의 손을 떠났다.
세월은 흘렀다. 1960년대에 들어선 미군부대는 한동안 벽계리의 풍경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1980년대 초반, 미군들이 철수했다. 미군이 떠난 자리는 한국군이 인수해 사용했다. 하지만 그마저 철수한 뒤에는 부대 터가 공터로 남았다.
그리고 또 한 번 변화가 찾아왔다. 국가가 미군부대 터를 민간인에게 불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마을에는 옛날 부대에 땅을 내주었던 주민 가운데 다시 그 땅을 사들인 사람이 있었다. 20여 년 전, 거의 거저 내놓다시피 한 땅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 땅값은 몇 배나 뛰어 있었다. 옛 주인은 결국 자기 땅을 다시 사들였다. 그때 그 사람이 남긴 말이 지금까지도 마을 사람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온다. “병아리값 받고 내준 땅을 황소값 주고 다시 샀다.” 그 한마디에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병아리 한 마리 값이나 다름없이 내놓았던 땅을, 이제는 황소 한 마리 값으로 다시 사야 했던 것이다.
그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나라의 필요에 따라 땅을 내놓아야 했던 서운함과 세월의 아이러니가 그 한마디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그로부터 또 수십 년이 흘렀다. 지금 미군부대가 있던 자리는 대부분 공터로 남아있다. 국가가 민간에 불하할 당시 타지인이 매입한 뒤 소유자가 몇 차례 바뀌었지만, 아직도 제대로 활용되지 않은 채 세월을 견디고 있다.
지기산 꼭대기에 있던 부대 시설은 더욱 묘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건물의 흔적과 함께 부대 터가 그대로 남아있고, 주변에는 철조망이 빙 둘러쳐진 모습이다. 한때 군인들이 오가고, 낯선 외국인들이 마을 풍경 속에 등장했던 곳. 마을 사람들이 조상의 산소를 옮겨야 했던 곳. 그리고 한 주민이 병아리값에 내놓았다가 20여 년 뒤 황소값을 주고 되찾았던 땅.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기억에서 미군부대의 흔적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하지만 벽계리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그 시절이 생생하다. 그 땅을 내놓던 날의 서운함도, 서울행 장항선 기차에 올랐던 마음도 생생하다.
마침내 자기 땅을 다시 사며 내뱉었던, “병아리값 받고 내준 땅을 황소값 주고 다시 샀다.”는 그 한마디가, 어쩌면 벽계리의 그 시절을 가장 잘 말해주는 역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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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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