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끝났지만 ‘동고록’ 연구는 이제 시작이다
신보균은 홍동면 수란리 왕지마을 출신으로 1906년 홍주의병에 참여해서 유병소 향관이라는 직책을 맡아 10여 일 동안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 과정에서 포로로 잡혔다. 이때 잡힌 포로는 80여 명으로 모두 경성으로 압송돼 재판받고 대부분 풀려나는데 신보균을 비롯한 9명만이 대마도로 유폐된다. 이들을 홍주9의사라고 부른다. 신보균은 1906년 6월 18일부터 1908년 6월까지 대마도에서의 유폐 생활을 일기로 남겼다. 표제는 같이 고생한 기록이란 뜻의 <동고록>이라 이름 지었다. <동고록> 4권 중 1권에 대해 지난달 25일 번역이 이뤄졌다. 번역된 내용을 3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홍주 9의사’는 하나의 생활·정신공동체였다
<동고록>을 읽으며 또 하나 새롭게 보이는 것은 ‘홍주9의사’의 실체다. 그들은 명단 속 아홉 명이 아니었다. 함께 밥을 먹었다. 아픈 사람이 생기면 돌봤다. 돈이 없으면 빌려줬다. 옷이 필요하면 직접 재단하고 꿰맸다. 가족에게서 편지가 오면 함께 기뻐했고 소식이 끊기면 함께 걱정했다. 칠석과 추석, 중양절과 동지를 함께 보냈다. 시를 지어 서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최익현을 중심으로 <소학>을 공부했다.
대마도 수용시설은 한편으로 일본의 통제 공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홍주의병들이 유교적 의리와 학문, 시문을 통해 정체성을 지켜낸 공동체였다. 이 때문에 <동고록>이라는 제목은 더 특별하다. 신보균은 ‘함께 싸운 기록’보다 ‘함께 고생한 기록’을 남겼다. ‘同苦’라는 두 글자에 그가 기억하고 싶었던 역사의 중심이 들어 있다.
신보균은 한시를 많이 남겼다. 기존 연구에서도 유준근과 문석환 등의 대마도 관련 기록을 통해 신보균이 지은 여러 수의 시가 확인됐고 최익현·임병찬과 홍주9의사들의 수창시를 분석한 연구도 있었다. 이번 <동고록> 완역의 차이는 단순히 시의 숫자를 늘리는 데 있지 않다. 그 시가 언제, 어떤 일을 겪은 뒤, 누구에게 보내기 위해 지어졌는지가 일기 속에 나타난다.
고향을 생각하며 지은 시, 칠석과 추석에 가족과 조상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 동료가 아플 때 지은 시, 편지를 받은 날의 시, 최익현과 주고받은 시, 일본인과 헤어지면서 지은 시가 사건과 연결된다. 시가 작품집 속의 문학에서 생활 속의 역사로 돌아오는 것이다. 신보균의 한시 역시 앞으로는 ‘우국한시 몇 수’가 아니라 <동고록>의 날짜·사건과 함께 새롭게 연구해야 한다.
신보균 출생연도까지 자신이 바로잡았다
<동고록>은 신보균의 기본 인적사항을 교정하는 근거도 제공했다. 일부 자료에는 신보균의 출생연도가 1861년으로 기록돼 있었다. 그러나 <동고록> 첫머리에서 신보균은 자신을 ‘을축생(乙丑生)’이라고 적었다. 을축년은 1865년이다. 홍성신문이 평산신씨 족보를 확인한 결과 족보 역시 을축생으로 기록돼 있었다. 자(字)는 사익(士翼), 호는 미호(眉湖), 평산신씨이며 홍주 왕지동에 거주했다는 내용 역시 일기 첫머리에 나타난다.
신보균 연구의 기본 출발점이 후대 기록이 아닌 본인의 기록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기존 홍성신문 보도도 이제 일부 다시 써야 한다, <동고록>의 완역은 기존 홍성신문 ‘義士 신보균은 누구인가’ 연재를 단순히 보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일부 평가는 보다 정밀하게 수정할 필요도 생겼다. 대표적인 것이 신보균과 최익현의 사상적 관계다. 기존에는 대마도에서 최익현을 만난 뒤 위정척사 사상을 받아들여 그것이 신보균의 사상적 토대가 됐다는 식으로 평가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동고록>을 통해 최익현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신보균 등 홍주의병들이 의관을 지키기 위해 일본 측과 충돌하고 절식을 감행한 사실이 확인됐다. 따라서 보다 정확한 평가는 이렇다. “신보균은 홍주의병 참여 이전부터 독자적인 유교적 의리 의식과 항일·자존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대마도에서 최익현을 만나 그의 강학과 수창을 통해 이를 더욱 심화하고 학문적으로 체계화했다.”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신보균의 주체성과 최익현의 영향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다.
반대로 기존 연구를 부정하기보다 다시 대조해야 할 사안도 있다. 신보균의 1906년 초 의병 참여 날짜와 경로, 홍주9의사 일부의 이름과 한자, 1908년 귀환 시점 등은 <동고록>과 다른 자료 사이에서 세부적인 차이가 보인다. 음력과 양력의 변환, 필사 과정의 오기, 자(字)와 본명의 혼용 가능성 등이 있어 <홍양기사>, <마도일기>, 공훈록, 족보와 원문을 함께 대조하는 교감 작업이 필요하다. 새로운 사료의 발견은 기존 기록을 곧바로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록을 다시 맞춰보게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번 완역을 통해 이제 신보균을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단순히 홍주의병에 참여했다 대마도에 유폐된 사람이 아니었다. 나라가 망해가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스스로 의병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홍주성이 무너질 때 유준근과 함께 남았다가 붙잡힌 사람이었다.
“죽음이 있을 뿐”···자신의 선택 굽히지 않았다
체포된 뒤 일본군 앞에서 “죽음이 있을 뿐”이라고 자신의 선택을 굽히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대마도에서는 조선인의 관을 벗느니 굶겠다고 저항했다. 최익현을 만나 시를 주고받고 <소학>을 배우며 자신의 의리정신을 더욱 깊게 했다. 일본인과 글을 주고받으며 조선과 일본, 국제 정세에 대해 논했다.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했고 동료의 병을 걱정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매일 기록했다. 그래서 이제 신보균을 설명하는 말도 달라져야 한다. 홍주의병 의사 신보균. 유학자 신보균. 우국시인 신보균. 그리고 <동고록>을 남긴 역사의 기록자 신보균. 그는 역사의 대상인 동시에 역사를 기록한 주체였다.
또 <동고록>이 보여주는 역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일제는 그의 몸을 가둘 수 있었지만 그가 누구인지를 결정할 수는 없었다. 관을 벗으라 했지만 거부했다.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했지만 거부했다. 고향을 빼앗겼지만 마음속에서 고국을 지우지 않았다. 총을 빼앗겼지만 글과 시를 빼앗기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을 빼앗기지 않았다.
하루하루를 기록해 후세에 넘겼기 때문이다. 그 기록이 120년 가까운 세월을 지나 다시 우리 앞에 놓였다. 신보균의 가장 큰 공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패전한 의병이었지만 패전 뒤에도 자신의 국가와 정신을 빼앗기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패배와 고통마저 기록함으로써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동고록>이 새롭게 열어놓은 역사 이번 <동고록> 완역의 가치는 크게 네 방향에서 평가할 수 있다.
‘동고록’의 역사적 가치 면밀히 살펴야
첫째는 홍주의병사다. 홍주성 함락 이후 체포된 의병들이 어떻게 서울로 끌려가고, 어떻게 처벌되고, 누가 대마도로 보내졌는지 그 공백을 채워준다. 둘째는 대마도 유폐사다. 홍주의병 9명이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잤으며 어떤 통제를 받았고, 무엇 때문에 일본군과 충돌했고, 서로 어떻게 의지하며 살았는지를 날짜별로 복원할 수 있다.
셋째는 최익현 연구다. 임병찬의 기록과는 다른 위치에 있던 홍주의병 신보균의 시선을 통해 최익현의 대마도 도착, 절식과 식사 재개, 강학, 수창, 병세 악화와 마지막 시기를 교차검증 할 수 있다. 넷째는 무엇보다 신보균 연구다. 그의 출생연도와 의병 참여 동기, 사상, 시문, 인간관계,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 기록자로서의 면모를 비로소 그의 목소리로 살펴볼 수 있게 됐다.
이 때문에 <동고록>은 홍성 지역의 향토자료에만 머물지 않는다. 홍주의병사와 한말 의병사, 대마도 유폐사, 최익현 연구, 한시 문학, 근대 한일관계사와 생활사를 이어주는 중요한 1차 사료로 검토할 가치가 충분하다. 번역은 끝났지만 연구는 이제 시작이다, 이번 완역이 <동고록> 연구의 끝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다. 우선 임병찬의 <대마도일기>, 유준근의 <마도일기>, 문석환의 <대마도일기>와 <동고록>을 날짜별로 나란히 배열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현재 전하는 <동고록> 복사본이 신보균의 친필 원본에서 언제, 누구에 의해 복사됐는지 확인해야 한다. 다른 이본이 있는지, 원본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지도 계속 추적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신보균은 나라가 망해가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죽음을 각오하고 홍주의병에 뛰어든 의병이었다. 패전과 체포, 해외 유폐 뒤에도 조선인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은 유학자였고, 최익현과 강학하고 시를 나눈 문인이었으며, 자신과 동료들이 겪은 고난을 <동고록>에 남겨 120년 뒤 우리에게 전한 역사의 증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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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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