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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한 칸에서 시작된 벽계리의 변화

김정헌 내포구비문학연구소장 기자입력 2026.10.04 09:14
외지인에게 세를 놨던 방.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방세는 살림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외지인에게 세를 놨던 방.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방세는 살림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양색시와 미군이 살았던 집. 벽계리에 미군들이 들어오면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느 날 갑자기 마을 담장 너머의 현실이 됐다.
양색시와 미군이 살았던 집. 벽계리에 미군들이 들어오면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느 날 갑자기 마을 담장 너머의 현실이 됐다.

벽계리에 처음 미군부대가 들어선다고 했을 때만 해도 주민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벽계리는 조상 대대로 농사를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온 마을이었다. 몇몇 성씨가 대대손손 집성촌을 이루었고, 이웃집 숟가락 숫자까지 알 만큼 서로의 사정을 훤히 알고 지냈다. 마을 사람들은 한 가족처럼 오순도순 살아왔다. 그런 마을에 군부대라는 낯선 시설이 들어온다고 했다.

‘앞으로 우리 마을이 어떻게 변할까.’ 처음에는 막연한 불안감이 앞섰다. 소문은 현실이 됐고 미군들이 들어오면서 벽계리에도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을의 변화를 바라보며 무척 조심스러웠다.

변화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어느 순간부터 주민들은 변화를 그저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 변화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미군부대가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생긴 문제는 사람들의 거주 공간이었다. 부대에는 미군만 생활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군들을 뒷바라지하는 한국인 근로자들도 필요했다.

미군들은 군사작전이나 행정, 훈련 등 핵심적인 업무에 집중했고, 부대 운영에 필요한 여러 일은 한국인들이 맡았다. 부대 경비를 서는 사람도 있었고, 막사와 주변을 청소하는 사람도 있었다. 빨래를 하거나 숙소를 관리하고, 온갖 심부름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는 먹고살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미군부대에서 일자리가 생긴다는 소식은 가뭄 끝의 단비처럼 반가운 소식이었다. 문제는 사람들이 머물 곳이었다. 부대에서 일하기 위해 외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이들을 받아줄 집은 턱없이 부족했다.

“방 하나 얻을 수 있을까요?” 외지인들은 마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방을 구했다. 예전 농촌집에는 사랑방이나 창고처럼 여유 공간이 있는 집이 많았다. 한 칸 정도는 어렵지 않게 내줄 수 있었다. 방이 넉넉한 집에서는 두 칸, 세 칸씩 세를 놓기도 했다.

당시 농촌에서는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농사 외에는 마땅한 수입원이 없는 시절이었다. 그런데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방세는 살림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자녀들의 학용품을 사고, 학교에 갈 차비를 마련하고, 살림에 필요한 물건을 장만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마을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집터가 넓은 집에서는 마당 한쪽에 방을 새로 만들었다. 망치질 소리가 하루 종일 이어졌다. 뚝딱뚝딱, 벽돌을 쌓고, 지붕을 올리고, 방을 만들었다. 방이 완성되기가 무섭게 세입자가 들어왔다. 마을 어를들의 기억에는 그때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부대에서 잡일 허는 사람들이 모두 민간인이여. 부대 경비도 민간인이 섰어. 막사 청소허구 심부름 허는 하우스 보이도 있었어. 그런 사람들이 우리 동네로 이사 와서 살었어.”

또 다른 주민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사람덜이 외지서 왔으니께 머물 방이 있으야 잖여. 그때는 교통이 나뻤으니께 천상 부대허구 가까운디루 방을 읃어서 지내야 헸지.” 방세는 살림에 큰 보탬이 됐다. “먹구 살기 어려운 시절인디, 방세를 받으니께 형편이 쬐끔씩 좋아졌지. 4000원, 5000원씩 받다가 자꾸 올러가서 3만원도 받었어. 그때 3만원은 큰돈이었지.”

조상 대대로 조용하기만 하던 벽계리는 원주민과 외지인이 뒤섞여 사는 마을로 변해갔다. 부대 주변에 생활용품을 파는 가게가 생겼고, 음식점과 양복점, 세탁소, 미장원 같은 업소도 하나둘씩 들어섰다. 그야말로 벽계리에 작은 도시가 만들어지는 듯했다.

미군들과 함께 생활하는 이른바 ‘양색시’들도 마을 안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한집 건너마다 양색시들이 미군과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저녁 무렵이면 미군과 양색시들이 팔짱을 끼고 길을 걷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런데 한집에서 함께 살고, 마당에서 얼굴을 마주치고, 인사를 나누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사람들이 어느새 오래 알고 지낸 이웃처럼 느껴졌다.

벽계리에 미군들이 들어오면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느 날 갑자기 마을 담장 너머의 현실이 됐다. 그 현실 속에서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문화를 경험했다. 말로만 듣던 외국인들과 가까이에서 생활해 보는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세상은 넓고 인종과 문화도 다양하다는 것을 체험했다. 다양한 사람들과 생활하며 진취적이고 폭넓게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기회가 되었다. 그야말로 책이나 방송에서 듣고 본 간접경험이 아니고, 직접 현장에서 함께 생활한 산 경험이었다.

1980년 무렵, 미군들이 철수하면서 벽계리에는 또 한 번 변화가 찾아왔다. 미군부대에서 일하던 외지인들도 하나둘씩 마을을 떠났다.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방을 빌려주던 집들도 다시 조용해졌다.

한때 외지인들로 북적이던 방에는 더 이상 사람의 온기가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빈방은 대부분 철거됐다. 마당 한쪽에 방을 여러 칸씩 만들어 놓았던 집들도 옛 모습이 사라졌다. 그때의 건설 붐도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벽계리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그 시절 망치 소리와, 그곳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억 속에 남아 있다.

📝
김정헌 내포구비문학연구소장 기자

기획·특집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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