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람들은 저렇게 생겼구먼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낯선 이야기지만, 1960~1980년대 광천읍 벽계리에는 미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흔적조차 희미해졌지만, 부대 주변 마을에는 그 시절만의 풍경과 웃음과 애환이 있었습니다. 이 연재는 거창한 역사를 기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가 미처 기록하지 못했던 홍성의 한 시대와 마을의 생활사를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미군부대가 들어선 벽계리는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의 북쪽 끝, 지기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조용한 농촌 마을이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금방 오갈 수 있는 거리지만, 예전에는 광천읍 소재지와 벽계리 사이의 풍경이 사뭇 달랐다.
광천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장항선 일대에서 손꼽히는 큰 시장을 품고 있었다. 광천장이 번성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가까운 옹암포구의 역할이 컸다. 서해안 원산도와 안면도 일대 천수만에서 잡힌 생선과 해산물이 옹암포구로 들어왔다. 포구에 들어온 해산물은 다시 광천시장으로 옮겨졌고, 기차와 육로를 통해 서울을 비롯한 내륙으로 실려 나갔다.
광천 정기시장은 4일과 9일에 열렸다. 광천장이 열리기 하루 전인 3일과 8일에는 옹암포구에도 장이 섰다. 배를 타고 들어온 섬 주민들은 광천장에 내다 팔 물건을 싣고 오기도 했고, 섬으로 돌아갈 때는 필요한 생활필수품을 사서 배에 실었다.
장이 서는 날이면 광천과 옹암포구는 장꾼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광천과 불과 십여 리 떨어진 벽계리는 딴 세상처럼 조용했다. 행정구역은 같은 광천읍이었지만 외지인의 발길은 드물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몇몇 성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논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그런 벽계리에 어느 날부터 낯선 사람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일은 참으로 알 수 없는 법이다. 그토록 조용하던 벽계리가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는 장소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벽계리에 미군 기지가 건설되면서 마을 풍경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졌다. 당시 농촌의 건설 현장은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원시적이었다. 사람들이 삽과 괭이로 땅을 팠고 벽돌도 사람 손으로 한 장 한 장 찍었다. 현대식 장비는 무거운 자재를 실어 나르는 트럭 한 대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벽계리에 처음 보는 거대한 기계들이 나타났다. 불도저가 땅을 밀어붙이고, 굴삭기와 포크레인이 흙을 퍼 올렸다. 덤프트럭은 쉴 새 없이 흙과 자재를 실어 날랐다. 사람 수십 명이 삽과 괭이를 들고 며칠씩 매달려야 할 일을, 거대한 기계들은 불과 몇 시간 만에 해치웠다. 사람들은 일하러 가다가도 신기해서 걸음을 멈췄다.
“저게 무슨 기계랴?” “사람들은 가만히 앉어 있구 기계가 일을 다 허네.” 어느새 공사장은 구경거리가 됐다. 들판에서 일하던 농부들도, 장을 보러 가던 사람들도, 아이들도 하나둘 공사장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 시절 사람들에게 미군부대 공사는 단순한 건설 현장이 아니었다. 아직 우리나라 농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이 있었다. “잠자리비행기가 온다!”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는 헬리콥터였다.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헬리콥터가 처음 벽계리에 내려오던 날에는 광천읍 사람들이 모두 몰려온 것 같았다.
그때만 해도 헬리콥터를 직접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떤 사람은 누에처럼 생겼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잠자리와 비슷하다며 ‘잠자리비행기’라고 불렀다. 헬리콥터는 임시로 마련한 막사 빈터에 내려앉기 위해 하늘을 뱅뱅 맴돌았다. 점점 고도를 낮추더니 땅 가까이 내려왔다.
그 순간이었다. “우우우우우웅!” 헬리콥터 날개 돌아가는 소리는 귀가 먹먹할 정도로 컸다. 바람은 사방으로 몰아쳤다. 흙먼지가 일어나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다. 사람들은 옷자락과 치맛자락을 붙잡으면서도 헬리콥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 무서우면서도 신기했다. 헬리콥터에서 미군들이 하나둘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사람들의 눈이 더 커졌다.
“미국 사람들은 저렇게 생겼구먼.” 당시만 해도 텔레비전이 흔하지 않았다. 외국인을 실제로 볼 기회는 더더욱 없었다. 백인은 물론이고 흑인을 실제로 처음 보는 사람도 많았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미국 사람을 본 적이 있는 사람들도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아이구, 미국 사람들은 저렇게 생겼구먼.” “저 피부 색깔이 워째서 저렇게 까맣댜?” “저 사람들은 덩치가 왜 저렇게 크댜?” 신기한 눈으로 미군들을 바라보며 첫 느낌을 주고받았다. 그날 벽계리 사람들은 태어나 처음으로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미국은 먼 나라였다. 그런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이제 자기네 마을 한가운데 들어와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외국인을 처음 본다는 의미만은 아니었다. 평생 논밭과 장터를 오가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피부색과 말씨, 옷차림을 가진 사람들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던 세상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저 사람들이 동네를 휘젓고 다니면 워떡헌댜?” 미군들을 바라보는 눈길에 신기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막연한 두려움도 밀려왔다. 미군들이 무섭다며 멀찌감치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들과 아낙네들은 건물 뒤나 나무 뒤에 숨어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동네 처녀들 잘못될까 봐 큰 걱정이구먼.” 특히 혼기가 찬 딸이나 여학생을 둔 집에서는 걱정이 컸다. 그만큼 당시 벽계리 사람들에게 미군은 낯선 존재였다. 더구나 미군을 따라 외지인들이 들어오고, 이른바 ‘양색시’라고 불리던 여성들의 모습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농촌 마을 어른들의 눈에는 낯설고 불편한 풍경이었다. 미군과 팔짱을 끼고 다니는 여성들을 보면 눈살을 찌푸렸다.
“내 참말루 눈 멀쩡허게 뜨구는 뭇 보겄네.” 오랜 세월 유교적인 질서와 농촌 공동체의 규범 속에서 살아온 어른들에게 서양의 개방적인 문화는 낯설 수밖에 없었다. 미군부대가 들어온다는 것은 단순히 군부대 하나가 생긴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벽계리에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화가 함께 들어오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두렵고 낯선 미군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을 사람들도 그들의 존재에 익숙해졌다. 처음에 걱정했던 ‘양색시’들도 마을에서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미군들은 미군들대로, 그 여성들은 그들대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공간에서 생활했다. 2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미군부대가 벽계리에 있었지만, 마을 젊은이들에게 심각한 풍기 문란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없었다.
오늘날 벽계리에서 당시 모습을 기억하는 젊은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80세를 전후한 마을 어른들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그날의 헬리콥터 소리가 생생하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내려앉던 거대한 비행기, 비행기에서 내리던 낯선 미군들, 멀리 숨어서 겁먹은 표정으로 구경하던 동네 아이들과 아낙네들. 그때 누군가 했다는 말이 지금도 옛이야기처럼 남아 있다.
“미국 사람들은 저렇게 생겼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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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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