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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과 좋은 공간이 만날 때

이남종 전 전주대 한문교육과 교수 기자입력 2026.09.07 08:39

앞 회에서 우리는 “九日湖之湄, 一人斗以南”을 통해, 여하정의 물가에 머무는 사람이 한가한 유람객이 아니라 공무의 무게를 아는 관인이며, 자기 자리를 의식하는 풍류의 주체임을 살폈다. 이제 주련은 “賓主東南美”로 나아간다. 물가에 머무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그가 누구와 함께 그 자리를 나누는가이다. 풍류는 혼자만의 감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좋은 공간은 좋은 사람을 만나야 비로소 깊어진다.

먼저 구절을 보자. 賓主東南美(손님과 주인이 동남의 아름다움을 다하였다). 이 구절은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나오는 “賓主盡東南之美”를 떠올리게 한다. 〈등왕각서〉는 등왕각에서 열린 성대한 모임을 배경으로 지은 명문이다. 왕발은 그 자리의 풍경만을 노래하지 않았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품격과 재능, 그리고 교유의 성대함까지 함께 그려 냈다.

왕발은 먼저 이렇게 말한다. 勝友如雲(뛰어난 벗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高朋滿座(높은 벗들이 자리에 가득하다). 또 이렇게 말한다. 人傑地靈(사람이 뛰어나니 땅도 신령하다).

이런 문맥에서 “賓主盡東南之美”는 단순히 손님과 주인이 많고 화려했다는 말이 아니다. 한 지방의 산수와 문물이 훌륭하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재능과 품격이 그 아름다움을 완성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美’는 외양의 아름다움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인물의 덕과 재능, 그리고 서로 알아보고 사귀는 교유의 격조까지 포함한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점이 있다. 왕발의 〈등왕각서〉에서 말한 ‘東南’은 중국 강서 홍주 일대의 지리 감각과 관련된다. 여하정이 있는 조선의 홍주는 그 동남과는 다른 곳이다. 그러므로 여하정의 “賓主東南美”를 조선 홍주의 실제 방위로 읽을 필요는 없다.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동남’이라는 방향 자체가 아니라, 왕발의 명문을 빌려 손님과 주인의 품격을 높이고, 그 모임의 격조를 드러내려 한 데 있다.

흥미롭게도 왕발의 홍주와 여하정의 홍주는 같은 글자 洪州를 쓴다. 그러나 두 홍주는 서로 다른 땅이다. 같은 이름의 우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왕발의 문장이 여하정 주련 속에서 ‘좋은 사람들의 모임’을 말하는 언어로 다시 쓰였다는 점이다. 중국 홍주의 등왕각에서 나온 “賓主盡東南之美”가 조선 홍주의 여하정에서 손님과 주인의 품격을 말하는 구절로 되살아난 셈이다.

그러므로 여하정의 “賓主東南美”도 경치의 아름다움만을 말하는 구절이 아니다. 여하정은 산과 물, 나무와 샘, 작은 연못이 어우러진 공간이지만, 그 공간만으로 풍류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그 자리에 마주 앉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손님과 주인 사이에 오가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산수는 자리를 마련하지만, 그 자리를 깊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이 점에서 “賓主東南美”는 여하정의 성격을 한층 분명히 해 준다. 이 정자는 혼자 숨어드는 은자의 공간만은 아니다. 공무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 잠시 마음을 가다듬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좋은 사람들과 마주 앉아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교유의 공간이다. 산수의 아름다움이 사람의 품격과 만날 때, 비로소 풍류는 깊어진다.

앞선 구절들을 떠올리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여하정은 적막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시선에서 출발했다. 이어 공무의 무게를 아는 사람의 자각, 작은 누대와 물 한가운데를 향하는 마음, 나무와 샘이 둘러선 산수, 작은 연못의 맑음, 그리고 물가에 머무는 사람의 자의식을 차례로 세워 왔다. 이제 “賓主東南美”에 이르러 그 풍류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확장된다.

결국 여하정의 풍류는 혼자 즐기는 산수의 정취만이 아니다. 그것은 좋은 사람과 좋은 공간이 만나 생겨나는 교유의 풍류이다. 산수는 배경이 되고, 정자는 자리를 마련하며, 사람은 그 안에 의미를 불어넣는다. “賓主東南美”는 바로 그 점을 말한다. 좋은 공간은 좋은 사람을 만나야 비로소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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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에서는 “其必有所樂”을 중심으로, 구양수 〈화방재기〉를 함께 읽으며 여하정 주련이 마지막에 이르러 어떻게 ‘마음의 낙’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는지 살펴보려 한다.

📝
이남종 전 전주대 한문교육과 교수 기자

사설·칼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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