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 ‘단식 순국’···동고록은 무엇을 말하는가
신보균은 홍동면 수란리 왕지마을 출신으로 1906년 홍주의병에 참여해서 유병소 향관이라는 직책을 맡아 10여 일 동안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 과정에서 포로로 잡혔다. 이때 잡힌 포로는 80여 명으로 모두 경성으로 압송돼 재판받고 대부분 풀려나는데 신보균을 비롯한 9명만이 대마도로 유폐된다. 이들을 홍주9의사라고 부른다. 신보균은 1906년 6월 18일부터 1908년 6월까지 대마도에서의 유폐 생활을 일기로 남겼다. 표제는 같이 고생한 기록이란 뜻의 <동고록>이라 이름 지었다. <동고록> 4권 중 1권에 대해 지난달 25일 번역이 이뤄졌다. 번역된 내용을 3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대마도 유폐···최익현 보다 먼저 단식
대마도 이즈하라에 도착한 홍주9의사들은 처음 도웅장개의 집에 딸린 잠실에 수용됐다. 신보균의 기록은 놀라울 만큼 자세하다. 높은 침상, 볏짚이 든 베개, 흰 무명 요, 붉은 담요, 세 명당 하나씩 지급된 모기장까지 기록했다. 삶은 나물, 닭고기, 국수, 생선과 말린 어육 등 어떤 음식이 나왔는지도 적었다. 위병의 숫자와 교대 방식까지 기록했다.
후일 새 수용시설로 옮겼을 때에는 더욱 세밀해진다. 건물의 길이와 폭, 방의 개수, 미닫이문, 유리창, 벽장, 다다미, 주방, 목욕시설, 세면대, 소변 시설, 화장실, 위병실, 파수막, 울타리와 대문까지 기록했다. 거의 건물을 실측해 놓은 기록에 가깝다.
향후 대마도 현지의 옛 군사시설 도면이나 지적도, 일본군 자료와 대조할 경우 당시 홍주의병과 최익현 등이 생활했던 감금 시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복원할 가능성도 있다. <동고록>이 정치사나 의병사뿐 아니라 생활사·건축사 자료로 평가될 수 있는 이유다.
이번 번역이 기존 신보균 평가를 수정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기존 홍성신문 보도와 일부 연구에서는 신보균이 대마도에서 면암 최익현을 만나 위정척사와 화서학파의 의리론을 깊이 받아들였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동고록>을 시간순으로 읽으면 중요한 사실이 드러난다. 최익현이 대마도에 도착하기 전인 음력 7월 2일, 홍주의병들은 이미 일본 측과 관을 벗는 문제를 놓고 충돌하고 있었다. 일본 측은 방 안에서는 관을 벗으라고 요구했고 이에 따르지 않으면 식사를 주지 않겠다는 식으로 압박했다.
신보균을 비롯한 홍주의병들은 이를 거부했다. 차라리 굶을지언정 관을 벗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관 하나가 목숨을 걸 문제인가 싶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유학자들에게 상투와 의관은 단순한 복장이 아니었다. 조선인의 정체성이었고 선왕에게서 이어받은 예법이었으며 일본식으로 자신을 바꾸라는 요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상징이었다.
최익현 만나기 전부터 죽음을 각오
따라서 매우 중요한 결론이 가능하다. 신보균의 항일의식과 의리정신은 최익현을 만나 처음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최익현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홍주에서 의병에 참여했고, 일본군 앞에서 죽음을 각오했으며, 대마도에서는 조선인의 의관을 지키기 위해 단식까지 선택했다. 그렇다면 최익현과 신보균의 관계는 보다 정교하게 설명해야 한다. 최익현은 신보균에게 항일정신을 처음 가르친 사람이기보다 이미 형성돼 있던 신보균의 의리와 항일의식을 학문적으로 심화하고 체계화해 준 스승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보균의 기록에 따르면 음력 7월 9일 최익현과 임병찬이 대마도에 도착했다. 홍주9의사들과 최익현·임병찬이 한 공간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최익현이 도착한 날에도 일본 측은 관과 삭발 문제를 들고나왔다. 일본 땅에서 일본 음식을 먹고 있으니 일본 법을 따라야 하며 관을 벗으라고 하면 벗고 삭발하라고 하면 머리를 깎아야 한다는 취지의 요구였다.
최익현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관을 벗고 머리를 깎아 선성·선왕에게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뜻으로 맞섰고, 일본 병사가 총창으로 위협하자 죽이려면 죽이라고 했다. 신보균을 비롯한 홍주의병들이 일주일 전 경험했던 갈등과 최익현의 저항이 하나로 이어졌다. 대마도 유폐 공간은 단순한 감옥이 아니었다. 일제의 문화적 복속 요구와 조선 유림의 정체성 수호가 충돌하는 또 하나의 항일 현장이었다.
<동고록>에서 학술적으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최익현의 단식과 사망 과정이다. 그동안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일본이 주는 음식을 끝까지 거부하며 단식하다 순국했다고 알려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동고록>에 따르면 최익현은 관과 삭발 문제에 항의해 음식을 끊었다. 그러고 음력 7월 11일 일본 측이 삭발과 변복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상황이 달라진다. 신보균은 그날 저녁 최익현에게 진지를 권해 모두 식사했다고 명확히 기록했다. 이 사실 자체는 임병찬의 <대마도일기>에도 나타나고 있다.
<동고록>의 진짜 가치는 다른 데 있다. 최익현의 제자인 임병찬뿐 아니라 홍주의병 신보균이라는 별개의 현장 목격자가 같은 사건을 날짜까지 맞춰 독립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두 기록이 서로를 강하게 교차 검증하는 셈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동고록이 최익현 단식설을 뒤집었다”고 단정하기보다, ‘지속적인 단식 끝에 순국했다는 대중적 통념을 보다 세밀하게 재검토할 필요가 있음을 다시 확인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
최익현 마지막 한 달의 목격자 ‘신보균’
<동고록>의 기록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신보균은 최익현의 병세가 시작되고 악화되는 과정을 곁에서 기록했다. 처음에는 감기 증세였다. 이후 기력이 쇠약해지고 가래와 풍담으로 보이는 증상이 나타났으며, 병이 깊어지자 혀가 말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맥이 가늘어졌으며 정신이 혼미해지는 상황까지 기록된다.
일본 군의가 찾아와 진찰하고 약을 처방했으며 우유를 제공한 일도 남아 있다. 일본인들이 밤새 간병했던 내용도 기록돼 있다. 최익현 자신의 말도 전한다. 노령과 타국의 물과 풍토가 맞지 않는다는 취지의 이야기였다. 이 기록 역시 임병찬의 <대마도일기>와 날짜별 비교가 필요하다. 두 1차 사료에 나타나는 병세와 처방, 인물들의 움직임을 나란히 대조한다면 최익현의 마지막 한 달을 상당히 정밀하게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동고록> 속 최익현은 단순히 병든 노의병장이 아니다. 그는 함께 유폐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학문을 이야기했다. 젊은 사람들이 다투면 불러 꾸짖었고 스스로 잘못을 반성하도록 했다.그리고 매일 <소학> 한 장씩을 강론하자고 했다. “소학은 사람을 만드는 본보기”라는 취지였다. 일본군의 감금 시설이 조선 유림들의 작은 강학소가 된 것이다. 이는 신보균과 최익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최익현은 홍주9의사들에게 각각 시를 지어 주었고 신보균에게도 증시를 남겼다. 그의 가문과 학덕을 평가하며 어려움을 겪은 뒤에도 절의를 온전히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격려했다. 더 주목할 것은 신보균 자신이 시에서 ‘사(師)’, 즉 스승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대목이다. “스승을 좇아 천 리를 건너는 것도 멀다 하지 않는다”는 뜻의 시구가 확인된다.
후대 학자들이 신보균을 최익현의 문인으로 평가한 것에 더해, 이제는 신보균 자신의 기록 안에서 스승을 뜻하는 표현과 실제 <소학> 강학의 모습이 동시에 확인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보균은 대마도에서 최익현과 우연히 같은 공간에 갇혔던 수감자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강학에 참여하고 수창하며 정신적·학문적 관계를 맺었던 인물로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총을 내려놓은 뒤에도 항일은 계속됐다
<동고록>을 읽으면 신보균의 저항이 홍주성 패전과 함께 끝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관을 벗지 않았다. 상투와 조선 의복을 지키려 했다. 일본식으로 자신을 바꾸라는 요구에 저항했다. 한시를 지었다. <소학>을 읽었다. 고국을 향해 절하고 명절마다 부모와 가족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일을 글로 기록했다.
홍주에서의 무장투쟁이 대마도에서는 문화적 저항과 정신적 항쟁으로 형태를 바꾼 것이다. 일본의 강요에 외형적으로만 저항한 것이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지키는 싸움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신보균의 항일운동은 ‘홍주성 전투’라는 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무장항쟁 → 문화적 저항 → 강학과 시문 → 기록을 통한 기억의 보존으로 이어진 긴 저항의 과정이었다.
대마도 유폐 생활을 단순히 ‘유배’나 ‘연금’으로만 표현하기 어려운 이유도 <동고록>에 나타난다. 수감자들에게는 풀 뽑기와 풀 베기, 청소, 식사를 운반하는 일 등이 부과됐다. 일본 병사나 통역 가운데 일부는 빨래까지 시켰고 말을 듣지 않으면 뺨을 때렸다. 신보균은 이들이 자신들을 “노예처럼 부린다”고 분개했다. 추석 무렵에는 일본 병사가 한 수감자에게 일을 시키며 폭행하다 칼까지 빼든 사건도 기록돼 있다.
따라서 침구가 지급됐고 음식을 먹었으며 군의 치료를 받았다는 몇 가지 사실만을 근거로 당시의 수용 생활을 ‘우대’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동고록>이 보여주는 대마도 수용 체제에는 숙식 제공과 의료, 감시와 통제, 강제노동과 폭력이 동시에 존재했다.
기록자로서 신보균의 특징은 일본인을 일률적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데서도 나타난다. 폭행하고 모욕하는 사람은 강하게 비판했다. 반면 병든 의병을 위로한 병사, 치료에 힘쓴 군의, 수감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한 사람, 이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한 주민들의 행동도 그대로 기록했다.
처음 수용됐던 집의 주인 도웅장개 가족은 홍주의병들이 새 감금 시설로 옮겨가게 되자 이별을 아쉬워하며 음식과 술을 마련했고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일본 군인이나 통역관이 조선 의병들에게 시를 써 달라고 청한 장면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 같은 기록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희석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국의 침략정책과 그 체제 안에 살았던 개인들의 감정과 태도가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미시사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일본 상인과의 ‘동아시아 국제 정세 논쟁’
<동고록>에는 예상 밖의 장면도 있다. 일본인 상인과 조선 의병들이 긴 필담을 벌인다. 일본의 근대화, 러일전쟁, 조선의 내정, 서양 열강, 국가의 독립, 인의와 무력 등을 놓고 논쟁한다.
일본 측에서 일본이 서양 열강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한다는 논리를 펴자 조선 측에서는 당시 조선을 ‘한 덩이의 양고기를 여러 세력이 노리는 형국’에 비유하며 일본의 침략 논리를 반박한다.
또한 조선의 정치적 문제를 간사한 무리가 권력을 농단해 군자가 제대로 쓰이지 못한 데서 찾고 일본 역시 무력보다는 인의와 신의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필담의 모든 발언을 곧바로 신보균 개인의 주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여러 수감자들의 답변과 대화가 함께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신보균은 국제 정세와 일본·러시아·서구 열강의 움직임을 전혀 모르는 고립된 유생이 아니었다. 그는 이러한 논의를 듣고 이해했으며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했다. 신보균을 단순히 ‘개화에 반대했던 보수적 척사 유생’으로만 규정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의 사상은 전통적인 유교적 의리론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그의 시야에는 러시아와 일본, 서구열강과 동아시아 국제질서까지 들어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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