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았던 결혼반지, 다시 돌아온 사랑
보령댁은 올해 80세가 되었다. 고향은 충청남도 보령이다. 스물여섯 살이던 1972년, 보령에서 광천 벽계리로 시집왔다. 시집온 뒤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본명보다 ‘보령댁’이라고 불렀다.
보령댁이 벽계리에 시집오던 때는 미군들이 가장 많이 드나들던 시절이다. 보령댁이 벽계리로 시집오면서 맨 처음에 마주한 것은 가난이었다. 시댁에는 마늘밭 500평이 있었다. 그런데 시집오던 그해에 밭을 놀리고 있었다. 밭에 심을 마늘 종자를 살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농사를 지을 밭은 있는데 종자가 없었다. 농부에게는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보령댁은 며칠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다가 문득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남편이 결혼할 때 마련해 준 석 돈짜리 금반지였다. 결혼식장에서 서로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평생 함께 살자고 약속했던 그 반지였다.
“이 반지를 팔아서 마늘 종자를 사면 어떨까요?” 보령댁은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하늘만 바라봤다. 가난 때문에 아내가 결혼반지까지 팔겠다고 나서는 것이 가슴 아팠을 것이다. 보령댁 역시 남편의 마음을 모를리 없었다.
“괜찮아요. 반지야 나중에 다시 사면 되지요.” 보령댁은 마음 아파하는 남편을 다독였다. 남편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는 결혼식장에서 서로에게 끼워주었던 석 돈짜리 반지를 함께 팔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마늘 종자를 샀다. 500평 밭에 마늘을 심었다.
그해 마늘 농사는 놀라울 정도로 잘됐다. 밭에서 거둬들인 마늘을 집 안팎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에서 장사꾼이 찾아왔다. 마늘을 본 장사꾼은 한눈에 물건을 알아봤다. “이거 다 삽시다.” 마늘은 한꺼번에 서울로 실려 갔다. 마늘을 팔고 나니 이런저런 비용을 제하고도 약간의 목돈이 손에 쥐어졌다. 보령댁은 그 돈을 바라보며 더욱 늘려나갈 궁리에 골몰했다.
마늘 농사 수익 밑천 삼아 미제 물품 장사 시작
보령댁은 농사만 지어서는 살림에 큰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때 생각한 것이 미제 물품이었다. 당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미제 물건은 한국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먹을거리부터 생활용품까지 미제라는 이름이 붙으면 귀하게 여겼다.
‘미제 물건만 잘 구하면 돈이 될 거야.’ 보령댁은 마늘 농사로 마련한 돈을 밑천 삼아 미제 장사를 시작했다. 마침 보령댁의 집은 미군부대에서 벽계리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 첫 집이었다. 퇴근하는 미군들은 대부분 맨 먼저 보령댁 집 앞을 지나갔다.
보령댁은 해질 무렵이면 집 앞에 나가 미군들을 기다렸다. 영어라고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장사를 하는 데 영어가 많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손짓과 표정이면 충분했다. 보령댁이 알고 있는 영어는 한두 마디밖에 없었다. ‘컴히얼(Come hear), 컴히얼(Come hear)’을 반복하며 손짓으로 가까이 오라고 했다. 미군들이 손에 들고 있는 간단한 물품을 가리키며 팔고 가라고 주문했다.
보령댁은 천성적으로 명랑하고 사교성과 수완이 좋았다. 밝게 웃으며 미군들에게 다가가면 웃으며 미제 상품을 주고 갔다. 이렇게 매일 매일 반복하다 보니까 미군들도 보령댁이 미제 상품을 전문적으로 구입한다는 것을 알았다. 부대 PX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을 자연스럽게 보령댁에게 건네주는 일이 잦았다. 서로 얼굴을 익히고 나서는 물건 거래가 더욱 많이 늘어났다.
그렇게 구한 미제 상품은 광천시장으로 가져갔다. 광천에서 미제 장사를 크게 하는 상인에게 되팔았다. 미군에게서 구입한 가격에 약간의 이윤만 붙여 넘겼기 때문에 인기가 좋았다.
미제 장사는 농사를 지을 때보다 수입이 훨씬 나았다. 돈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하자 그냥 집에 쌓아두지 않았다. 당시 농촌에서 목돈을 마련하는 대표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쌀계’였다. 여러 사람이 계를 조직해 정기적으로 돈이나 쌀을 모으고, 차례가 돌아오면 목돈을 타는 방식이었다.
미군 군복 빨래 하면서 악착같이 살림 일궈
보령댁은 쌀계를 활용해 목돈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논과 밭을 조금씩 늘려갔다. 결혼반지 석 돈에서 시작한 돈이 마늘이 되고, 마늘이 다시 장사 밑천이 됐다. 그리고 장사로 번 돈이 다시 논과 밭이 됐다. 가난한 농촌 아낙네의 손에서 작은 밑천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보령댁은 미제 장사만 한 것이 아니었다.
“돈 되는 일은 몸이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다 했어.” 미군을 상대로 돈이 될 만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그중 하나가 빨래였다. 보령댁은 미군들의 군복 빨래를 맡았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열 명이 넘는 미군들의 빨래를 해주었다. 특히 양색시들과 함께 살던 미군들의 빨래가 많았다. 보령댁은 그때 일을 이렇게 기억한다.
“살림하는 양색시들은 자기가 하기 귀찮으니까 우리한테 빨래를 맡겼어. 자기는 몸치장이나 하지, 귀찮은 일을 왜 하겠어?” 미군 군복을 깨끗하게 빨았다. 풀을 먹이고 다리미로 반듯하게 다려서 갖다주었다. “그렇게 해서 돈 벌었어. 그 바람에 어깨 인대가 늘어나서 고생도 많이 했어. 어떤 때는 빨래하고 그 집 가서 청소도 해주고 돈 되는 짓은 다 했어.”
말 그대로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았다. 빨래도 하고 청소도 했다. 미제 물건도 사고팔았다. 농사도 지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악착같이 살림을 일궈갔다. 몸이 아픈 줄도 모르고 일했다. 어깨가 망가진 것도 뒤늦게 알았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미군들은 벽계리를 떠났다. 마을을 가득 채웠던 외지인들도 떠났다. 보령댁의 아이들도 어느새 장성했다. 보령댁의 큰딸이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 보령댁과 남편은 큰딸의 혼수품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의 금은방을 찾았다. 그런데 남편은 딸의 혼수품을 마련하기 전에 아내의 손부터 바라봤다.
딸의 혼수품을 사기 전에 보령댁의 반지부터 먼저 사서 끼워주었다. 오래전 마늘 종자 살 돈이 없어 팔았던 바로 그 반지를 다시 마련해 준 것이다. 남편은 보령댁의 결혼반지를 평생동안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뚝뚝한 남편이 평생동안 가슴 속에 담아두고 살았을 결혼반지를 생각하면서 더욱 가슴이 먹먹해 왔다.
평생의 고마움이 담긴 남편이 사준 금반지
보령댁은 반지를 손에 받아 들고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500평 마늘밭에 종자를 심던 날, 미군들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컴 히어, 컴 히어”를 외치던 날, 열 명이 넘는 미군들의 빨래를 하며 어깨가 아파도 참고 일하던 날, 쌀계를 타서 논과 밭을 조금씩 늘리던 날, 그 모든 시간이 반지 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옛날 일을 떠올리던 보령댁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남편을 생각하는 보령댁의 가슴에는 안타까움만 가득한 듯했다. 남편 이야기를 하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평생 함께 살 줄 알았는데, 남편이 몇 년 전에 먼저 세상 떠났어. 좋은 세상 더 못살고 지병이 있어서 한참 앓다가 떠났어. 가난한 살림에 고생만 많이 하고 간 것이 마음 아프지.”
보령댁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유난히 반짝였다. 그 반지는 단순한 금반지가 아니었다. 가난했던 신혼 시절의 약속이었다. 함께 고생했던 세월이었다. 그리고 평생을 잊지 않고 있던 남편의 마음이었다. 보령댁 얘기를 함께 듣던 벽계리의 또래 할머니들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잘 알기에 동병상린의 감정을 공유하며 표정이 숙연해졌다.
그들도 비슷한 세월을 살아왔다. 가난했고, 고생스러웠고, 힘들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누구 하나 특별히 힘들다고 말할 여유조차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 일했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또 일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살림을 만들기 위해 허리가 휘도록 일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꿈을 꾼 것 같기도 하다.
보령댁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맺힌다. 그 눈물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가난을 이겨내고 한 가정을 일으켜 세운 한 여인의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눈물이다. 그 시절 어머니들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며 살림을 일으키고 자식들을 키웠다. 오늘의 우리가 누리는 작은 풍요 뒤에는 그렇게 평생을 바친 어머니들의 세월이 있었다.
보령댁의 석 돈짜리 결혼반지는 그래서 단순한 금반지가 아니다. 가난을 이겨낸 한 시대의 훈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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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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