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쉰들러’ 이야기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는 바느질집으로 불리던 장재연 할머니가 살았다. 6년 전 9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지만, 우리 마을로 시집와 한평생 한복 짓는 일을 하시며 4남매를 키우셨다. 이 할머니에게는 몇 가지 일화가 있다.
갓 시집온 새댁 시절, 당시 마을 처녀들은 대부분 학교를 가지 못해 한글을 배우지 못했다. 서부 판교리에서 야학을 하셨던 친정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할머니는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낮에는 농사 일을 하고 밤에는 사랑방에 모이게 해 한글을 가르치며, 처음에는 ‘ㄱ, ㄴ, ㄷ, ㄹ’부터 쓰게 하고 따라 읽도록 했다.
그런데 한 처자가 ‘기역, 니은’까지는 읽고 말했으나 도무지 그다음이 생각나지 않아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그러자 평소에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죽일년, 살릴년’이라고 하였단다. 지금도 가끔 연세가 80대 중후반 되시는 마을 어르신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또 하나의 일화는 참으로 안타까운 지역사다. 6·25전쟁으로 우리 마을이 인민군에 점령당하고 인민군은 지역마다 인민위원장을 내세웠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돼 다시 우리 마을은 수복됐다. 전쟁으로 여러 곳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당시 은하면 소재지 홉내(합천마을)에 16명의 인민군이 주둔하면서 은하초등학교 운동장 남쪽 가장자리에 긴 구덩이를 파서 다음 날 살생부에 올라와 있는 이들을 처형해 그곳에 매장하려 했다. 또한 포승줄로 쓰기 위해 전날 미리 짚으로 새끼를 꼬아 두도록 했다.
그 계획을 알아차린 인민위원장 장용갑 선생은 고들미(결성면 원형산)를 넘어 국수굴(은하면 금국리)로 들어서는 인민군을 막아서며 “은하면 지역은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 말라”하며 오랜 설득 끝에 돌려보냄으로써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우리 마을 장재연 할머니의 친정아버지인 장용갑 선생의 이야기다.
은하면 소재지에서 홍성으로 가려면 나지막한 솔고개를 넘어야 한다. 장재연 할머니는 국군이 인민군을 밀어내고 인민위원장이었던 친정아버지가 홍성경찰서로 끌려가던 모습을 솔고개까지 따라가며 지켜보았다고 한다.
약 3개월간 장용갑 선생이 인민위원장을 맡았을 때에, 인민군에 의해 위기에 처했던 유명 인사 중 당시 홍성경찰서장 전병석 씨를 비롯하여 해경총장 홍세기 씨, 국회의원에 출마했던 전용안 씨, 종로경찰서장을 지낸 윤종화 씨(고향인 청양에 피난왔다가 인민군에 체포돼 홍성경찰서에 잡혀 있었음) 등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막았고, 후에 본인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 덕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유족 측과 지역민들의 증언이 있다.
그런 일로 인해 조선일보나 헤럴드신문에 ‘한국의 쉰들러’로 소개되기도 했으며 전국대학총장연합회로부터 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난 8월 19일은 ‘세계 인도주의의 날’이다. 2003년 8월 19일 인도주의 활동가 22명이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테러로 희생된 것을 기려 2008년 UN이 제정했다. 인간 존엄을 민족 구별 없이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한다는 오늘,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
마을의 이장으로서 어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소중한 마을의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고자 ‘마을 이야기 책’을 만들었고, 마을 어른들 생전의 육성을 녹음해 저장하면서 기록·보존에 노력하던 때를 떠올리며, 세계 인도주의의 날을 즈음하여 다시 한번 인간 존엄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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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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